고흐의 슬픈 눈빛을 뒤로하고 다음날 아침 우리들은 일찍이 호텔을 나섰습니다.
암스텔담에서 헨델의 생가가 있는 할레까지 달려가야 할 길이 600km...
달리기만 한다면 6시간 정도 걸리겠지만
중간에 쉬면서 자동차도 먹이고 우리고 먹고...
거의 하루 종일 걸리는 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실수.... 고속도로가 잘 되어 있어서 신나게 달려서 할레 시내에 들어가서 네비가 목적지라고 알려준 곳으로 갔는데 역시 오래된 도시인지라 자동차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는 곳에 이르렀고 그나마 그곳도 자동차를 세울만한 여유가 없는 아주 좁은 골목이었습니다. 그래도 어찌어찌해서 차를 겨우 세우고 골목길을 돌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헨델 하우스를 발견하고 들어갔는데..... 마침 그 날이 월요일... 대부분의 뮤지엄들은 월요일에 문을 닫지요. 그런데 여행일정을 세우다보니 그것까지는 미쳐 생각지 못한거예요. 그래도 사무실에는 사람이 있어서 멀리 한국과 미국에서 왔다고 잠간 볼 수 없겠느냐고 사정을 해도 안된다고...ㅋㅋ 할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그 날 마지막 목적지인 라이프치히로 갔습니다. 라이프치히까지는 불과 45km... 라이프치히에 도착하여 예약한 호텔을 찾느라 또 고생...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 하기로 하고 아무튼 다음 날 아침에 다시 할레로 갔습니다. 헨델의 생가를 찾아서....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에... 그러나 어제 이미 다녀갔기에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인생은 역시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우는 수 밖에 없는지...
헨델이 태어난 집(헨델 하우스)은 1666년부터 헨델의 아버지가 살던 집인데
할레市가 1948년에 헨델기념관으로 오픈 했다고 합니다.
헨델은 이 집에서 1685년에 태어나서 1703년 18세 때 함부르크로 갈 때까지 살았습니다.
헨델의 아버지는 외과의사겸 이발사였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63세 때
두번째 부인인 34세의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독일에서는 외과의사가 이발사까지 겸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니
지금 외과의사들이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할까요? ㅎ
예나 지금이나 부모들의 마음은 다 같은지 아버지는 엄격했고 헨델이 음악을 하는 것을 반대하고
변호사가 되기를 원해서 악기 사용을 금했지만 헨델은 어려서부터 음악에 소질이 많았고
모든 악기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5살쯤 된 어린 헨델은 어느 날 밤에 다락방에 몰래 올라가 클라비코드(clavichord)를
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밤중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클라비코드 소리에 놀라서 깬 식구들이
다락방에 있는 헨델을 발견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그린 그림이
그가 태어난 작은 방에 걸려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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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 하우스는 1948년에 기념관이 되었지만 건물이 너무 낡아 전면적으로 수리를 해서
1985년 헨델 탄생 300주년 되는 날 새로 오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최근에 또 다시 단장을 했는지 실내는 조금 어두웠지만 아주 깨끗했습니다.
그가 악기를 좋아했기 때문인지 한쪽 방에는 악기들만 모아놓은 방이 제법 크게 있었고
다른 쪽으로는 함부르크, 이태리, 하노버, 런던 등 헨델이 다니던 도시마다 구분하여 여러개의 방에
잘 전시되어 있었고 작은 연주홀도 있었지만 그가 사용하던 물건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헨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악은 매년 부활절이나 성탄절에 미국사회는 물론
이곳 교포사회의 많은 교회에서 어김없이 전곡이 연주되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수난,
속죄, 부활 등을 주제로 3부로 되어 있는 오라토리오 <메시아>입니다.
헨델은 52세 때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구의 몸이 되었다가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고
1741년 6월, 56세에 <메시아> 작곡을 착수하여 거의 침식을 끊고 작품을 쓰면서
스스로도 감동에 겨워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불과 3주 동안에 완성한 곡입니다.
제 1부: 서곡과 예언과 탄생,
제 2부: 예수의 수난과 속죄,
제 3부: 부활과 영원한 생명
서곡과 53곡의 독창과 합창곡으로 구성된 오라토리오 <메시아>,
1742년에 초연할 당시 영국의 왕 조지 2세가 제 2부의 마지막 합창곡인 '할렐루야' 합창 부분에서
너무 감동스러워서 기립했다는 일화로 오늘 날에도 이 합창을 부를 때면 모든 청중들이
일어나는 관습이 있는, '할렐루야' 한 곡만으로도 세계인의 칭송을 받기에 충분한 작곡가,
후대 사람들은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또 생각나는 것은 아주 오래 전에 2만명 이상 들어가는 애나하임 컨벤션 센터에서
<메시아> 전곡을 록뮤직으로 공연했던 것을 관람하며 신선한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고
바로 몇달 전 이곳 어느 한인교회에서 박지혜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신앙간증과 함께
앙콜곡으로 헨델의 <사라방드>를 구두도 벗어버린채 방방 뛰면서 록버전으로 연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두번 다 듣기에 그다지 반감이 일지는 않았습니다.
헨델이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했을지는 매우 궁금하지만....
헨델과 바흐는 같은 해에 같은 독일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헨델은 1685년 2월 23일 할레에서, 바흐는 1685년 3월 21일에
할레에서 215km 정도 떨어진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났습니다.
같은 해, 불과 한달 사이에 태어났지만 그들의 생애는 참 많이 다릅니다.
바흐는 일생 독일 땅을 떠나지 않았던데 비해서 헨델은 일찍이 독일의 함부그크나
이태리의 피렌체, 베네치아 등에 가서도 공부를 하고
영국으로 가서 영국에 귀화하여 영국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또한 바흐는 많은 자녀를 낳아서 음악을 한 자녀들도 많은데 비해
헨델은 독신으로 살다가 외롭게 이국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당대에도 이미 유명했던 두 사람은 서로의 명성을 알고 있었기에 서로 존경하며
만나고 싶어 하기도 했지만 여러번 서로 엇갈리고 결국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합니다.
헨델은 생의 3분의 2정도 되는 47년간 영국에 살면서 가끔 어머니를 만나러 고향집에 온 적이 있는데
그가 65세 되던 1750년에 고향집을 마지막으로 찾았을 때
할레에서 가까운 라이프치히에 있던 바흐는 이미 한달 쯤 전에 죽었고
할레에 있는 헨델이 세례를 받은 성모 마리아 교회에는 마침 그 때 바흐의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Wilhelm Friedemann Bach, 1710 - 1784)가 오르가니스로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한번도 만난 적이 없이 바흐는 65세까지 살고 헨델은 74세까지 살았는데
오늘날 후대 사람들은 한 사람은 '음악의 아버지'로, 다른 한 사람은 '음악의 어머니'로 기억하고 있으니
이 세상에는 이런 특이한 인연(?)도 있나 봅니다.
우리같은 평범한 인생이야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인연이 있다 한들
누구 한사람 애닲아 하지도 않겠지만 바흐와 헨델이니 만큼 당대에 만나지 못한 것이
두고 두고 세대를 넘어 오늘날까지도 하나의 에피소드로 남아있는 것이겠지요.
어느 책에서 읽은 음악의 아버지와 음악의 어머니에 관한 썰렁한 에피소드...
그 저자가 학교 다닐 때 음악선생님이
"만약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음악의 어머니 헨델이 결혼을 한다면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누구일까요?"라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저마다 모짜르트나 베토벤이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런데 정답은 "음악"이었다고 하네요.
저자도 썰렁한(?) 문제였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썰렁한가요? ㅎㅎ
그러나 나름 의미도 있는 것같습니다.
만일 그들이 만났다면 무슨 대화를 했을까? 조금 궁금해서 상상해 보았습니다.
술이라도 한잔 함께 했을까요? 그러면서 "아, 음악가들이 궁중에 메여서
작곡을 하는 것이 도무지 싫은데...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라는 대화를 했을까요? ㅎㅎ
당시에 음악가들은 거의 궁중의 고용인들로 귀족들이 의뢰하는 음악을 작곡하기도 하고
주로 궁중에서 연주를 하였으니까요. 그러므로 헨델의 아버지도 헨델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고 합니다.
생전에는 만나지 못했으니까, 하늘나라에서 만나서는 무슨 대화를 할까?
아마도 헨델은 바흐한테 "세바스찬, 아, 그 요즘 애들 말이야,
내 <메시아> 곡을 왜 그렇게 록뮤직으로 연주하고 난리들이지?
<사라방드>는 또 어떻고, 아, 글쎄 박지혜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방방 뛰면서
사라방드를 연주하더라니까...그것도 교회에서 말이야...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듣기가 그리 나쁘지는 않더구만....어쨋든 내가 작곡한 곡이니까..."
혼자 상상해 보았습니다. 상상은 자유니까요.ㅎㅎ
못말리는 첼로...
외국 여행할 때마다 뮤지엄에서 어린 학생을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로댕박물관에서 불과 3, 4세로 보이는 귀여운 어린이들을 만났을 때
이런 꼬마들을 박물관에 데려오는구나...어려서부터 이렇게 문화에 접하다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곳에서도 초등학교 3, 4학년이나 될까...어린 학생들이 선생님이 설명하는 것을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알아듣지 못하는 독일어...ㅋㅋ
그래서 음악을 만국 공용어라고 하는가 봅니다.
언어는 몰라도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나 들을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음악...
이 도시에서는 1952년부터 매년 국제 헨델 페스티벌이 열리는데 헨델 기념관에서는 물론
교회나 기타 시내 여러 곳에서 헨델의 오페라, 오라토리오, 등을 공연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갔던 날은 2014년 5월 26일과 27일이었는데
이곳에도 축구에 대한 관심이 많은지 이런 포스터가 비에 젖어 구겨져 있었습니다.
2014년 6월 1일 11시에 헨델하우스 홀에서 축구컨서트?
독일이 이번 월드컵에서 몇 등이나 할까요?
매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는 여기 저기에서 불꽃놀이를 벌립니다.
사진멤버들이랑 롱비치 퀸메리호가 있는 곳에 가서
불꽃의 향연을 렌즈에 담는다고 가서 찍은 사진입니다.
한시간 전부터 삼각대와 함께 카메라와 케이블릴리즈, 검은 보자기 등을 준비하고,
카메라는 bulb mode, f 11-13, iso 100-200, 그리고 focus는 auto로 미리 맞춘 다음
manual로 돌리고...그렇게 단단히 준비하고 있다가 폭죽이 터지면 서텨 릴리즈를 누르면서
불꽃에 맞추어 검은 보자기로 렌즈를 가렸다가 열었다가 하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찍어야 하는데
막상 폭죽이 터지기 시작하자 허둥지둥...
겨우 익숙할 즈음에 15분 동안의 불꽃의 향연은 끝나버리고...
어찌나 아쉽든지... 또 일년을 기다려야 하는데...ㅎㅎ
우리 인생도 그렇게 허둥지둥하다가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닌지...
헨델이 작곡한 Music for the Royal Fireworks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입니다.
1749년 4월 27일, 런던의 그린 파크에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평화조약을 축하하기 위해 대규모의 불꽃놀이 축제가 열렸는데
이 때 헨델이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어 이 음악을 작곡하여 연주했다고 합니다.
여름밤이면 할리웃 볼이나 다른 야외 음악당에서 불꽃놀이와 함께 하는 음악회에는
항상 단골 레퍼토리가 되는 곡이지요.
25세 때 영국을 처음 방문하고 2년 뒤 다시 영국으로 가서 47년간 그곳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한편으로 고아들을 돌보며 자선사업에도 적극적이었던 헨델은
1759년 4월 6일 코벤트 가든 가극장에서 <메시아>를 지휘했는데
마지막 아멘 코러스가 끝나자 기진해서 쓰러졌고 그 1주일 뒤인 성금요일 밤에
74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무덤은 영국 위인의 예우를 받아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詩人) 코너에
헨델이 작곡한 <메시아>의 악보를 손에 쥐고 있는 기념상으로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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