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나무
- 이정하 -
그대가 어느 모습
어느 이름으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갔어도
그대의 여운은 아직도 내 가슴에
여울되어 어지럽다.
따라나서지 않은 것이
꼭 내 얼어붙은 발 때문만은 아니었으리.
붙잡기로 하면 붙잡지 못할 것도 아니었으나
안으로 그리움 삭일 때도 있어야 하는 것을.
그대 향한 마음이 식어서도 아니다.
잎잎이 그리움 떨구고 속살 보이는 게
무슨 부끄러움이 되랴.
무슨 죄가 되겠느냐.
지금 내 안에는
그대보다 더 소중한 또 하나의 그대가
푸르디푸르게 새움을 틔우고 있는데.
***
체질적으로 더운 것을 싫어하고 추운 것이 차라리 좋은 첼로인데
겨울이 없는 이곳에 살다보니 겨울이 무척 그리워질 때가 많답니다.
그러므로 겨울여행이 좋아서 북해도의 출사를 선뜻 간다고 나서기는 했지만
그렇게 혹독한 추위에 더구나 어떻게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염려 가운데 떠난 출사였습니다.
일본 최 북단에 위치한 북해도, 홋카이도..
영하 섭씨 10도가 훨씬 넘는... 겨울 내내 눈이 무척 많이 온다는 설국이지요.
그러므로 환상적인 겨울풍경이 펼쳐지는 곳이기에
뮤직 비디오나 광고 촬영도 이곳에서 많이 한다고 합니다.
우아하고 멋진 동작이 마치 발레를 하는 것같은 단정학과 백조들,
저 눈 밭에서 사슴의 슬픈 눈망울도 만나고... ㅋ
하늘인지 땅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끝도 없이 펼쳐진 눈덮힌 눈밭,
여인의 속살처럼 부드러운 그 능선에 추위에 떨고 있는 나목들과
여름에는 울창했을 숲..
마치 보석같은 모습의 백설을 이고 있는 가녀린 가지들은
우리를 유혹하기에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알아준다고,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
그러나 그저 사진 찍는 일이 좋아서, 사진이 좋아서 모인 우리들 일행 5명,
발이 시리고 손이 곱아서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저 눈 앞에 펼쳐지는 설경이 좋아서
환호를 지르면서 셔터를 누르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래요, 그냥 그랬지요.
아무런 잡념이 끼어들 틈새를 주지 않고
우리는 그저 그냥 그렇게 셔터를 눌러댔습니다.
장갑이 있었지만 장갑을 끼고는 둔해서
손가락만 나오는 장갑을 끼고 사진을 찍자니
손가락이 몹시 곱아서 핫팩이 있는
포켓에 손을 자주 집어 넣어야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눈이 내렸는지 눈은 더 쌓여있고
여전히 내리고 있었습니다.
엘에이는 겨울이 없는, 일년 열두달 눈이 내리지 않는 곳...
멤버들 거의가 오랫동안 겨울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기에
모두들 이곳에서 그저 한 달이라도 머물고 싶다고,
차 한 잔 마시면서 창 밖에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겠다고,
우리는 그렇게 소박한 꿈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4박 5일의 짧은 일정이 끝나고
돌아갈 날이 되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왔습니다.
다시 갈 기약도 없으니
그저 이렇게 바람같이 다녀온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엘에이에 돌아오니 밝고 따뜻한 날씨가 우리를 반겨주었고
핑크빛 매화의 가지마다 벌써 꽃봉우리가 맺혀있네요.
이곳은 1월이 지나고 2월이 되면 여기 저기 봄꽃이 피기 시작하니까요.
계절은 그렇게 바뀌는 것이지요.
저 눈 속에서 추위에 떨던 나목들도 머지 않아
푸르고 푸른, 새 옷을 입고 푸르른 봄과 원숙한 여름을 맞이하겠지요.
세월이 그렇게 흘러가면서
마음의 상처도 아물고
그리움도 그렇게 여울지고
끝내 지울 수 없는 추억들도 잊혀질테지요.
그러나 계절의 겨울은 지나고 나면 봄이 오지만
우리네 인생이야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가고 있으니..
그래서 슬프지요, 그래서 아프지요.
그래도 인생이 그런 것이니까
가는 세월 그 누구가 막을 수가 있나요.. 라고
서유석이 노래했던가요? ㅎ
이렇게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행복한 첼로입니다. ㅎ
일찍부터 바이올리니스트로서도 재능을 보였던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Jean Sibelius, 1865 - 1957)가 유일하게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 Violin Concerto in D minor, Op. 47입니다.
겨울풍경을 보면 언제나,
아직 가 보지 못했지만 북구라파 핀란드가 생각나고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생각납니다.
핀란드의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같은 슬프고도 환상적인 선율에
북구라파의 애수에 푹~~ 빠져버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러시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David Oistrakh (1908 - 1974)의 연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