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나누는이야기

빠리의 화려한 사교계를 들여다 본 것처럼..../ 음정 첼로님

그 작은숲 강가 2014. 11. 1. 20:35

 

 

 

프랑스를 좋아하는 것, 그 나라의 역사는 물론 언어, 패션, 음식,

문화, 예술, 음악, 문학, 등등...모든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프랑코필 francophile, francophilia이라고 한다지요?

반대로 좋아하지 않고 적대시하는 것은 Francophobe...??

 

 

 

 

 

그런데 불어는 한마디도 모르고,

그렇다고 패션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나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문화, 예술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유럽의 다른 어느 나라 보다 프랑스에 대한 매력에 허우적거리는 첼로입니다.ㅎ

 

"빠리를 다녀가신 분들은 (관광차, 여행이라고 할게요.)

Cello (트리오)님처럼 다들 그렇게 말씀하세요.  하지만 그곳서 여러 모양의 이방인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눈물겹지요. 치열한 생존 현장이니까요.  언어, 물질, 학업... 이 삼중고를 짊어져야 하니까요.

저처럼 혼자 짊어지는 사람은 더욱 그렇구요.  돌이커보면 그래도 웃음과 기쁨이 많이 있었어요.

웃어서 행복했구요~

13년 빠리 유학생활, 13년 귀국 이후 생활, 그러니까 내년 2014년은 이 둘이 상쇄되는 원년(빵년)이에요~~

아, 누군가에게 이런 말 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 생각지도 못했어요.  감사합니다~"

 

빠리에 유학으로 가서 10년 이상 살았다는 다움의 어느 블로거,

빠리의 삶이 그다지 환상적이지 않았다고, 저의 빠리 여행기를 보고

음악정원 카페의 어느 블로거가 올린 댓글이었습니다.

그랬겠지요.  유학생으로 그곳에서 어렵게 공부를 하고 있었으니

저처럼 한가하게, 그리고 아주 잠간 둘러본 사람과는 빠리를 보는 관점이

많이 다를거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제가 빠리에 대한 허상을 안고 있다면 그 분은 실상을 안고 계시는 것이죠.

허상과 실상은 잠시 조우할 수는 있어도 다시 돌아서면

허상과 실상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사실 미국에 사는 것도 그래요.

서울에서 잠시 잠간 여행으로 다녀가시는 분들에게는 얼마나 좋아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이민자의 삶이 그다지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요.  인생이 다 그런 것이겠지만요.

 

 

 

 

 

장님이 코끼리의 한 면만 만져 보고...코끼리를 알았다고, 보았다고 하듯이

제가 건방지게도 유럽여행기를 쓰면서도 항상 부끄러운 점이 그런 면입니다.

 

유럽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예술가들의 생애를 제대로 알기나 하나,

하기사 나 자신도, 내 마음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첼로인데

그래도 이런 자유로운 공간이 주어져서 이렇게 실없고 부족한 글을 올릴 수 있고

더우기 공감해주는 이웃님들이 계시니 감사하고 행복할 뿐입니다.

올 빠리 여행기를 이미 4편을 올렸는데

다시 몇 편 더 올리려면서 서론이 길어졌네요.

 

 

 

 

 

 

5월 마지막 날 31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낮 12시5분 출발하여 불과

1시간 조금 지난 2시 15분에 드골공항에 도착해서 나오는데 긴 통로를 따라 가득하게

<1900 Paris >전시회를 알리는 포스터들이 벽에 붙어있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1900 Montmartre> 전시회를 봤는데 이 무슨 행운인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택시를 타고 공항에서 조금 먼, 시내를 벗어나 있는 호텔을 찾아가는데

기사가 알겠다고 하더니 호텔을 못 찾는거예요. 

분명히 주소가 있는데 호텔같은 건물이 없으니까 기사도 조금 당황하더군요. 

기가 막혀서... 한참만에 찾고 보니 무슨 호텔이 주소는 큰 길로 되어있는데

골목에 돌아 앉아있더군요.  그러니 못 찾을 수 밖에...

더구나 시내에서 한참 벗어난 지역이라 실망에 실망... 공항에 도착하여 설레던 마음이

실망으로 이어져 버렸습니다. 에고고 여기서부터 어떻게 시내를 다니지? 

 

방에 들어가 보니 조촐한 방... 잠시 머물기에는 충분한 방이었지만

독일여행에 피곤해져서 그런지 마음이 심드렁해 지면서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리고 그냥 집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냥 있을 수는 없어서 메트로를 두번? 이나 갈아타고서 샹제리제 거리에 나갔지요.

사람들로 붐비고 가로수는 울창한데 1월에 빠리를 방문했던 그 모습이 아니더군요.

역시 나는 겨울의 빠리가 좋아...  여름에 오면 더 좋을 줄 알았는데...ㅋ

 

 

 J9D18876.jpg

 

 

 

 

다음 날 아침에 <1900 Paris> 전시회가 열리는 쁘띠 팔레로 나갔습니다.

상제리제 거리에서 가깝고 알렉산더 3세교 바로 옆에 있는 쁘티 팔레...작은 궁전이라는 뜻인가?

알렉산더 3세교, 그랑 펠리스, 쁘띠 펠리스는 1900년에 열린 빠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만든

다리와 건물이라고 합니다.

 

 

 

 

 


 

왼쪽은 세계 엑스포를 알리는 포스터이고

Le Petit Journal에 실린 엑스포 개막식 사진이네요.


            Paris 1900:  The City of Entertainment

지난 일세기 동안 엄청난 정치적인 격변기를 보내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랑스는 안정을 구가하며 근대화로 치달리는 싯점에서 1900년 4월 14일부터 11월 말까지

빠리에서 열린 세계 엑스포...만국박람회가 열렸습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이 행사를 위해서 알렉산더 3세 다리를 놓고 철도를 놓고

메토로 전철 1호선을 개통하고 그랑 팔레, 쁘티 팔레 등을 건축하며  준비했고

"Achievements of a Century"라는 케치프레이즈로 세계 각국으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5천백만의 관광객들이 몰렸다고 합니다.

 

 

 



 

 

독일에서 열렸던 <1900년 몽마르뜨> 전시회가 1900년 전 후 몽마르뜨에서 활동하던

많은 예술가들이 가난하고 고독한 가운데 예술혼을 깨워 창작하여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들을 전시한 전시회라면

<1900년 Paris> 전시회는 당시 빠리의 패션, 화려한 사교계, 그리고 근대화에 따른

각 분야에서의 성장과 발전을 보여주는 전시회인지라 흑백 영상을 많이 보여주었고

그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가구나 생활용품들도 선을 보였습니다.

 

1900년 몽마르뜨 전시회에서는 보지 못한 조각가 로댕의 작품과,

마네, 세잔느, 시슬리 등의 그림이 있더군요.  그들은 이미 부유층 예술가들이었는지,

그러나 로트렉의 그림과 포스터는 이곳에도 있었습니다.

 

 

  

IMG_4737.jpg

 

 

 

 

  

Claude Monet (1840-1926) Mympheas, 1907

Paul Cezanne (1839-1906)가 그린 Ambroise Vollard 초상화

Edgar Degas (1834-1917)

Lucien Levy-Dhurmer(1865-1953)의 Beethoven, 1906

 
 




 




 

 

 

 



 

 

 




 

<1900 Paris> 전시 외에 상설 전시장에도 흥미있는 작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포스팅을 올리면서 대한제국시대였던 우리나라의

1900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하여 검색을 해 보니

1900년에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고, 만국 우표 연합 가입과 종로에 가로등이 설치되었다고 하며

1900년 빠리 만국박람회에도 25여명의 한국인들이 고종황제가 쓰던 물건과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매우 가는 명주섬유, 수채화(한국화), 놋그릇, 군인갑옷, 각종 씨앗 한지, 자기류, 악기 등을 가지고

박람회에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Le Petit Journal은 1900년 12월 16일 날짜에

"청.일 전쟁 이후에 한국인들이 빠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했다"라는 간단한 기사와 함께

아래 오른쪽 화보를 전면에 실었다고 합니다.

 

 


Le Petit Journal-Pavillon de la Coree


 

 

한국관을 총 지휘했던 책임자는 민영찬이었고 1902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전시를 위해 가지고 갔던 국악기들은 프랑스에 기증하여

현재도 일부 악기들은 Masion de la Musique 산하 악기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른쪽 포스터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참 재미있습니다.

114년 전, 1900년, 그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로 프랑스까지 갔다면 상당히 고위관직이거나

왕족일 것인데 지게를 진 농부도 보이고 청나라 관직의상을 입은 사람도 보이고

겨울이라 누비로된 핑크 두루마기를 입은 여인이 가운데 크게 보이네요.

당시의 빠리 패션에도 별로 뒤지지 않았을 것같습니다.

 

누굴까?  심히 궁금해서 검색해 보았지만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지금 빠리에 미쳐있는 트리오의 선조는 아닐까...ㅎㅎ

상상은 자유, 노택스이니까요...

 

 

여행 중에 잠간 관람한 <1900 Paris>전시회...

마치 "영원의 틈새를 바라 본 새처럼"(류시화의 시, "여행자를 위한 서시"에서),

아니면 추운 겨울 가난하고 불쌍한 성냥팔이 소녀가

양초와 성냥을 팔다가 화려한 불빛이 보이는 빠리 사교계의 파티를

창틈으로 몰래 훔쳐 본 것같다고나 할까요? ㅋㅋ

 

 

 

 

포스팅을 올리면서 로댕의 연인 까미유 끌로델의 작품 "왈츠"는 전시되지 않았지만

이 음악이 오랫만에 생각났습니다.

베버의 "무도의 권유, Invitation to the Dance"입니다.

 

 

 

 

 

 

 

 

 

독일의 작곡가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의

"Invitation to the Dance (Aufforderung zum Tanz) 무도의 권유" Op. 65입니다

 

1819년에 아내 Caroline의 생일선물로 작곡한 곡이라고 합니다.

베버는 이토록 사랑하는 아내곁을 40세에 떠났네요.

원래 베버는 피아노 곡으로 작곡했지만 1841년에

헥토 베를리오즈 (Hector Be가 오케스트라곡으로 편곡하였습니다.

 

베버는 악보에 하나하나 스토리를 적어넣었다고 합니다.

* 소절 Bars 1-5 first appearance of the dances

* Bars 5-9 the lady's evasive reply

* Bars 9-13: his pressing invitaion

* Bars 13-16 her consent

* Bars 17-19 he begins conversation

* Bars 19-21 her reply

* Bars 21-23 speaks with greater warmth

* Bars 23-25 the sympathetic agreement

* Bars 25-27 addresses her with regard to the dance

* Bars 27-29 her answer

* Bars 29-31 they take their places

* Bars 31-35 waiting for the commencement of the dance

* The Dance

* The conclusion of the dance, his thanks, her reply, and their retirement.

(from wikipedia)

 

위의 내용을 보면 무도회에서 한 신사가 귀부인에게 춤을 청하는데

부인이 조금 망설이자 적극 권유하지요. 서로 대화를 나누고 드디어

의견이 일치하여 아름다운 샹들리어가 빛나는 화려한 무도장으로 나가

눈부시게 함께 춤을 추고...춤이 끝나자 서로 인사하며

돌아가는 모습을 그대로상할 수 있습니다. ㅎㅎ

http://cafe.daum.net/musicgarden/Eccn/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