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나누는이야기

청주.....고드미 마을과 단재 신채호 / 음정 금마타리님

그 작은숲 강가 2016. 10. 12. 06:39




 

[청주] 고드미 마을과 단재 신채호

< 2016. 9. 28 >






본래 청주시 산내 이상면 지역으로 조선 광해군 때 신요라는 분이 곧은 말로 상소하여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리어 이곳으로 들어와 숨어 살았다고 한다.
인조가 반정하여 여러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이 마을을 곧은미,고디미,고드미, 또는 귀래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단재 신채호기념관












天鼓頌(하늘북)


吾知鼓天鼓者 其能哀而怒矣

哀聲悲怒聲壯 喚二千萬人起

乃毅然決死心 光祖宗復疆土

取盡夷島血來 其흔於我天鼓


나는 아네 하늘북 치는 사람을

그는 슬퍼하기도 성내기도 하네

슬픈 소리 서럽고 노한 소리 장엄하여

이천만 동포를 불러일으키나니

의연히 나라 위해 죽음을 결심케 하고

조상을 빛내고 강토를 되찾게 하나니

섬 오랑캐의 피를 싸그리 긁어 모아

우리 하늘북에 그 피를 칠하리라

(신채호 작, 박정규 역)









고드미 마을은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이신 단재 신채호 선생이 어린시절부터 성균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자란 마을로, 1936년 만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신 후 이곳에 안장하였다.












신채호 선생과 부인 박자혜 여사의 동상












단재 선생은 한말 언론·교육·신민회(新民會) 활동을 통해 계몽운동을 전개한 분으로 중국 망명 후에는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운동 노선을 견지하면서 외교론 중심의 상해 임시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활동했으며, 1920년대 중반 이후 무정부주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또한 역사연구를 통해서 한국근대역사학의 방법론과 인식을 성립시켰다.












영정을 모신 사당






































단재 신채호 선생의 영정






































단재 선생이 순국하신 후 어릴적 할아버지와 살던 집터인 이곳에 안장하였으나 후에 뒤쪽으로 이장하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소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게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달라"하던 생전의 선생님 부탁을 이루지 못한 것은 후손을 위해 무덤을 쓰자는 문중과 지인들의 뜻이
너무 거세었던 때문이다. 결국 일본인들이 유해를 묻는 일마저 방해해 가족과 일가들은 단재의 집터 귀래리에 몰래 묻어야만 했다.









































































































































































녹색체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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