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나누는이야기

지루하지요? 볼레로! 마티스 미술관 .../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 Boléro / 음정 cello911님

그 작은숲 강가 2015. 3. 10. 07:13

 

 

 

지난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낮 11시에 월트 디즈니 컨서트 홀에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음악회로

Bolero: Ravel's Dance for Orchestra라는 타이틀로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 Boléro 연주와 함께 발레 공연이 있었습니다.  엘에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가끔씩 토요일 낮공연에 어린이들을 위한 음악회을 하는데 어린이들이 지루하지 않게

공연시간은 중간휴식 없이 1시간으로 무용이나 해설을 곁들여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하지요. 

당연히 어린이들이 좀 떠들어도 용납이 되는 자유스러운 분위기의 음악회입니다.

전에도 한 두번 가본 적이 있는데 그 날은 마침 발렌타이데이...

물론 우리집 꼬맹이들 둘과 둘째딸이 함께 했지요. 

좌석은 앞에서 세번째...그동안 음악회에 다니던 중에 가장 무대와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볼레로 Boléro는 원래 18세기 스페인의 민속 무용의 한 형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라벨이 1928년에 러시아 출신의 발레리나이며 안무가인 이다 루빈스타인의 의뢰하여

발레 음악으로 작곡하여 오늘날 볼레로 하면 라벨의 이 음악이 떠오르게 되지요.

발레와 함께 연주되는 곡이지만 오늘날은 음악 자체만 연주되기도 합니다 .

그러나 사실 이 곡은 매우 단조로운 리듬이 계속되기 때문에 지휘자나 연주자들도

연주하기를 싫어한다는 곡이고, 첼로도 물론 지루해서 별로 듣지 않는 곡이예요.

 

 

 

 

그런데 그 날 공연한 볼레로는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3명의 발레리나들의 스토리가 있는 공연이었기 때문입니다.

낡은 music box 하나를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는 어린 딸이 

라벨역의 지휘자와 음악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되더군요.

그 날 음악회의 주제가 어렸을 때 들었던 음악이 어떻게 그 사람의 일생에 영향을 끼치는가 였거든요.

 

엄마가 남긴 뮤직박스를 보면서 죽은 엄마를 그리워하며 애타게 엄마를 보고 싶어하자

어느 날 딸에게 나타난 엄마가 아빠와 함께 춤을 추다가 엄마는 다시 사라져버리고....

여전히 엄마를 그리워하는 딸에게 이번에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잠간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자

엄마의 환영을 본 딸은 아빠와 함께 객석의 여리저기로 애타게 엄마를 찾아다니다 드디어

누더기를 걸친 엄마를 만나게 됩니다. 엄마는 아빠와 함께 곤혹스러운 모습으로 춤을 추다가

입고 있던 초라한 모습의 누더기를 벗고 눈부시게 화려한 하얀 드레스로 다시 멋진 춤을 추고....

 

드디어 엄마는 춤을 끝내고 서서히 사라집니다.  

엄마의 춤추는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던 어린 딸은

비로서 마음 속에서 엄마를 영원히 떠나 보내고

엄마와 함께 했던 음악과 춤을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하지요.

 

 

 

 

이태리의 조각처럼 창백하고 깍은 듯한 얼굴의 젊은 자휘자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연주는

아주 조용하게 시작했다가 점점 크게 치달아 절정에 이르르고

세 명의 발레리나들은 무대를 벗어나 객석까지 돌아다니는 입체적인 구성으로 공연을 하더군요.

 

오똑한 콧날이며 잘룩한 허리, 작은 엉덩이, 마치 비너스같은 모습의 미모의 엄마 역의 발레리나,

날씬한 다리와 함께 아버지 역의 남자 무용수의 허리에 달라붙은 궁둥이가 씰룩거리는 모습까지

무대에서 세번째 줄에 있는 자리에서 너무나 잘 보여서 공연이 더욱 흥미로웠고

음악도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무언 無言의 음악과 무용은 역시 강력한 communication의 힘이 있었는지

공연하는 동안 감동에 겨웠던 딸과 저는 공연이 끝나고 동시에 눈이 마주쳤는데

둘 다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훌륭한 공연에 객석에 있던 딸과 엄마 사이에

무언의 교감이 흘러서 카타르시스를 체험한 잊지 못할 음악회였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 하지만 딸이 셋이나 있는 엄마에게

둘째는 아무래도 신경을 덜 쓴 딸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 속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내색은 별로 하지 않았고,

그러기에 더욱 독립적이고 씩씩하게 자라준 딸, 자랄 때도 주위에서 둘째가

아들이었으면 좋았었겠다는 말을 많이들 했었습니다. ㅋ

 

 

Henri Matisse, "Dance II", 1910, 캔버스에 유채, 에르미타주 미술관 (image from internet)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다녀온 니스에 있는 마티스 미술관을 어떤 음악과 함께 소개할까 고심하고 있었는데 

이 공연을 보면서 마티스의 작품 "춤"이 생각나면서 사진촬영도 허락하지 않아서 소개할 자료들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수도 없는 마티스 미술관을 이 음악과 함께 소개하고 싶어졌습니다.

저에게 포스팅에 함께 올리는 음악은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거든요.

 

 

 

 

 

 

르누아르 미술관에서 나와 니스에 있는 샤갈 미술관 주소를 입력하고 떠났는데

샤갈 미술관 주위에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1 마일정도 떨어진 마티스 미술관으로 먼저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도 여전히 주차할 곳이 없어서 미술관 주위를 몇 바퀴나 돌다가 누군가에게 물어보니

조금 더 가면 수퍼마켓이 있는데 그곳에 주차하라고 해서 겨우 주차를 하였습니다.

운전과 주차가 여행 내내 저를 짓눌렀던....무정, 무정한...ㅋㅋ

 

 

 

 

남프랑스는 19세기 후반부터 오늘날에도 많은 화가들이 빛을 찾아,

 

빛에 따라 달라지는 사물의 변화를 찾아다니던, 화가들의 로망인 곳이었는지

앙리 마티스도  모로코, 타히티, 알제리, 코르시카, 등등 빛을 찾아 다니며 전전하다가

1917년 니스에 정착하였다고 합니

그가 사랑한 빛은 여름날의 뜨거운 태양이 아닌,

겨울의 은색빛 햇살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티스는 여름이면 번잡한 니스를 떠나 다른 곳으로 여행하고

겨울에 돌아왔다과 하니... 겨울에 니스를 찾은 첼로에게는

더욱 정겹게 느껴진 화가입니다.

 

그가 37년이나 살던 집, 마티스 미술관은 넓은 공원 소나무 숲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늦은 나이 (21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강력한 색채에 대한 매력에 름뻑 빠져서

결국 안정된 직장도 버리고 화가의 길을 선택하여 야수파의 거장으로 얻은

"색채의 마술사"라는 별칭에 어울리게 마티스 미술관은 붉은 벽돌로 된 집이었는데

사진에서 보기와는 다르게 외벽의 붉은 색이 낡고 바래고 지저분하게 보이고

사람들도 별로 없는 추운 겨울이라 그랬는지

쓸쓸하고 을씨년 스러워 세월의 무상함마저 느껴졌습니다.

 

 

 

아침도 먹지 않고 나왔는데 이미 오후가 되었지만 주위에 식당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아서

입장료를 내고 미술관부터 들어갔는데 촬영불가...ㅋㅋ  

미술관 내에는 안내원들만 있고 관객은 거의 없이 매우 한가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그랬는지 미술관마다 너무 조용하더군요.

 

넓은 전시실을 천천히 둘러보니 제법 큰 여러개의 방과 지하층에 까지

마티스의 작품들, 기타 개인적인 사진들은 물론 상당히 많은 자료들이 있었지만

미술관 안을 지키는 눈이 많아서 도촬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사진 활영을 허락했더라면 수 백장을 찍어서 보여드릴 것이 많았을텐데

사진을 못 찍게 하니 재미도 없고 배는 고프고...

 

 

Henri Matisse, Blue Nude II, 1952, Paris, Musee National'd Art Moderne

 

 

기념품 가게로 들어가서 평소에 좋아하던 그의 작품 '푸른 누드'를 한 점을 샀습니다.

'푸른 누드'는 아시다시피 말년에 종이를 오려서 붙인 콜라주 작품...

그림에 문외한이지만 여체의 곡선미가 단순하면서도 날라갈 듯 아름답고

남프랑스 지중해의 짙푸른 바다를 상징하는 강렬한 블루 칼라가 좋아서...

제가 블루색을 좋아하거든요.

 

집에 와서 봐도 너무 마음에 들어...에고고...다른 작품도 더 사올 껄,

작은 사이즈라 값도 저렴했는데... 라고 또 껄!!! 했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은 좋아하지만, 너무 흔하여 진부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좀체로 뮤지엄 매점에서 기념품을 구입하지 않는 첼로인데

이런 작품 한 점 정도 구매하는 것은 기분을 무척 상쾌하게 하더군요.

 

 

 

 

앙리 마티스(Henry Matisse, 1869 - 1954)

 

 

20세기 야수파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그도 처음에는 벌률가가 되려고 했기에,

(부모님들의 마음은 세계 어디나 공통적인지 자녀를 법률가나 의사, 등 안정된 직업을

가지게 하나봅니다.) 마티스도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기로 근무하는 중에

맹장염과 합병증이 겹쳐서 1년간 요양을 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그림도구를 사주었다고 합니다.

21세 때.... 유명한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좀 늦은 나이인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일종의 파라다이스로 옮겨진 듯한

착각에 빠졌다.  뭔가가 나를 몰아갔다." 고 회고했다고 합니다.

역시 인생은 뭔가에 미쳐야 한다듯이...

그러나 어찌 미친다고 모든 일이 다 잘 되겠어요? 

각고의 노력과 타고난 재질도 있어야겠지요.

 

퇴원 후 여전히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 틈틈히 그림을 그렸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은 결국 안정된 직장을 뛰쳐 나가게 하고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립미술학교 교수이며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의 아틀리에에서 기초부터 배우지요.

초기의 많은 작품들은 바르종파의 밀레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배우며 자신을 단련시켜가다

결국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색을 위주로 한 회화작업으로 아성을 쌓게 되지요.

 

 

색종이를 오리고 있는 마티스 (image from internet)

 

 

이미 야수파의 거장으로 불리워지는 등 명성을 떨치던 마티스는

만년에, 일흔이 넘어 결장암 수술과 탈장으로 오랫동안 침대 신세일 때

손떨림과 관절염으로 붓을 쥘 수가 없었는데도 그는 침대에 누운채

긴 장대 끝에 크레용을 묶어 대형 그림을 그리거나 색종이 콜라주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마티스가 가위질을 한 뒤 조수에게 지시해 캔버스에 색종이를 붙이는 방식인

색종이 콜라주로 미술계의 또 다른 장르를 형성하지요.

 

 

Henri Matisse, Large Reclining Nude (The Pink Nude), 66 x 92 cm, 1935, Baltimore Museum of Art (image from internet)

 

 

그런데 그 누구보다 마티스는 참 행복한 화가였던 것같습니다.

누구나 인생에서 만남이 중요하겠지만 마티스는 말년에 정말 좋은 만남이 있었네요.

그동안 마티스는 수 많은 모델들의 그림을 그렸지만 1932년, 그의 나이 63세에

조수겸 가사도우미로 고용한 러시아 태생의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 (Lydia Delektorskaya와의 만남...

무척 총명하고 명석하여 솔본느 의과대학에 합격해서 빠리에 왔지만 학비가 부족하여

대학을 포기하고 여러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던 그녀를 마티스가 반즈 재단 벽화를 그릴 때

허드레 일을 시키느라 고용하지요.  리디아는 당시 마티스의 명성도 몰랐으며

그림에 대한 식견도 전혀 없던 때였지만 시키는 일을 꼼꼼하고 세심하게 잘 해내었기에

마티스의 마음에 들어 2년 뒤에는 그녀를 모델로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가 자신을 그린 마티스의 작품 앞에서 뭔가를 수정?하고 있는 모습,

Lydia, 그림에서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image from internet)

 

 

 

 

마티스는 러시아 여성 특유의 큰 체격과 시원한 윤곽을 굵직한 선으로 묘사하면서

그의 그림이 더욱 단순해지고 명쾌해지고 이 시기에 그녀를 모델로 그린, 위의 <핑크 누드> 외에도

많은 작품이 나왔고 마티스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도 그녀의 초상화이지요.

 

화가와 모델....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일 것입니다.

화가의 예술창작에 모델은 꼭 필요한 뮤즈...

아무래도 직업적으로 단순히 모델 역을 수행하는 모델도 많겠지만

모델로 앉아서 자기 자신을 그리는 화가에 대해 어떤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겠지요.  화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러므로 리디아는 마티스에 대해 존경과 사랑을,

마티스도 리디아에 대해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챈 아내, 아멜리는 마티스에 대한 애증과 리디아에 대한 질투로

결국 1939년 마티스가 70이 된 늦은 나이였지만 두 사람은 결별을 하지요.

그런데 리디아의 역활은 모델이나 뮤즈로서 끝나지 않았더군요.

그는 마티스가 작업하는 과정을 일일이 꼼꼼하게 기록하는 등, 모델이라기 보다는

한 예술가의 조력자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여 그녀가 남긴 모든 기록들은

오늘날 마티스의 작품에 대한 이해를 위한 귀중한 역사적인 자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마티스가 1954년에 세상을 떠나자 마티스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출판하고

마티스의 그림들을 미술관에 기증하는 등 마티스를 미술계에서 영원히 불멸의 존재로 남아있게 한

조력자였다고 하니 마티스 만큼 행복한 화가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마티스를 검색하다가 재미있는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위의 사진은 앙리 마티스가 이미 소개한 르누아르 미술관이 된 레 콜레트 별장에 방문해서

함께 찍은 사진으로 사진 윗줄 가운데가 마티스, 왼편에는 아들 피에르,

오른쪽은 르누아르의 아들 Jean인 것같고 아래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르누아르입니다.

그런데 마티스의 증손녀 Sophie Matisse(1965 - )도 컨템포러리 아티스트로 현재 뉴욕에 살고 있고 

소피의 할아버지인, 마티스의 아들 피에르의 아들, 소피의 아버지 Paul Matisse는 조각가로

미동부 마사츄세츠에서 살고 있군요.  더구나 재미있는 것은 마티스의 아들

피에르와 결혼했던 Alexina (소피의 할머니)는 나중에 이혼하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에

콧수염을 그려넣은 화가, 마르셀 뒤상 Marcel Duchamp과 재혼을 하였군요.

그러니까 마르셀 뒤샹은 소피 마티스의 의붓 할아버지... ㅋㅋ

 

첼로, 너 지금 뭐하고 있니?  ㅎㅎ

그만 해라, 누구나 검색하면 다 아는 일인데...

인그래도 인터넷 세상을 돌아다니는 검색...  재미있네요.

항상 유명한 사람들의 후손들이 궁금하거든요.

 

 

 

 

 

 

 

미술관 내에는 카페같은 곳도 없어서 그냥 나왔더니

날씨는 흐려져서 춥고 배는 고프고...에고고, 불쌍한 첼로... 불쌍이야!

그래도 공원 한 쪽에 조그만 카페가 열려 있었습니다.

추워서 따뜻한 것이 먹고 싶어서 수우프가 있느냐고 물으니 없다고,

차가운 샌드위치 같은 것만 있고 먹고 싶은 음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따끈한 와인인 뱅쇼 Vin Chaud... 날씨가 추운 날 걸어다니다가

길 가에서 파는 따끈한 와인은 몸을 녹이고 기분을 좋게 하거든요....룰

달라고 해서 뱅쇼로 몸을 녹이고 나서야 공원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공원 한 켠에 고대 로마 유적지가 그대로 남아 있더군요.

마치 로마에 온 것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유적지들을 둘러보고 갈 길이 바쁜 나그네...

1 마일 떨어진 샤갈 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몇 잎이 안타깝게 남아있는 

이름도 모르는 가로수를 하늘을 향해서 한 컷 찍고....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 Boléro...  솔직히 말해서 너무 지루한 음악이예요.

지루하지요?  그래도 발레를 보시면서 들어보시기를...

발레리나 Maya Plisetskaya는 1925년생,

러시아 모스코바 출생으로 20세기 최고의 발레리나입니다.

볼레로를 배경음악으로 한 공연의 다른 많은 동영상 중에서 역시 가장 멋진 것같습니다.

공연을 마치고 나서 거의 5분 가까이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으로 보아도

그녀의 명성을 짐작하게 합니다.

 

Maurice Ravel (1875 - 1937)는 프랑스의 바스크지방의 Ciboure에서

바스크계의 어머니와 스위스인 아버지로부터 태어났는데 부모님들이 부유하였기에

파리 음악원에서 가브리엘 포레에게 음악을 배우며 작곡에만 전념한 작곡이지만

그의 음악은 세계대전을 체험한 시대가 시대인 만큼 염세주의나 비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밝고 명랑하지 않고 대부분 애잔한 슬픔이 흐르는듯 합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스폐인과의 경계에 가까운 곳이라고 하네요.

어머니는 Basque인으로 어려서 스페인에서 살 때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서 들은 스페인에 대한 이야기는 라벨이 작곡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1928년에 당시 발레리나로 유명했던 이다 루빈스타인 (Ida Rubinstein) 여사의 의뢰를 받고

볼레로를 작곡하므로 명성은 최고조로 달했다고 합니다.

1932년 자동차 사고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37년에 사망하였습니다.

 

 *  남프랑스 여행기 계속됩니다.

    제 여행기, 지루하시지요? 

    빨리 끝내려고 하는데 좀체로 진도가 나가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