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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나체로 산책했다는 앙티브, Antibes, France /사라사테 Sarasate /Zigeunerweisen /음정 cello911님

그 작은숲 강가 2015. 2. 3. 02:11

 

앙티브의 석양...

 

 

Pablo Picasso: "Night Fishing at Antibes", 1939, 피카소의 "앙티브의 밤낚시", MoMa, New York

 

 

 

 

2015년 1월 11일

꿈도 야무지게 첼로가 남프랑스 앙티브를 가고 싶어한 이유는

피카소가 그렸다는 <앙티브의 밤낚시> 같은 그림은 사진으로 재현할 수 없지만

모네가 그렸다는 <앙티브의 아침> 같은 앙티브 해안 풍경을 렌즈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숙소에서 가까우니까 아침에도 가고 해질녁에도 가서 아침 바다도 저녁 석양도

담고 싶었기 때문인데...ㅋㅋㅋ

그러나, 에고고... 무정, 무정한 남프랑스 여행이여...

 

 

"Morning at Antibes", Claude Monet, French, 1888, Oil on canvas, 25 7/8 x 32 5/16 inches

모네의 "앙티브의 아침", 필라델피아 미술관소장

 

모네는 1888년 1월부터 5월까지 4개월 동안 남프랑의 찬란한 태양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변한

작은 마을 앙티브, 푸르고 핑크빛 나는 아름다운 산이 있고 멀리 만년설이 덮힌 알프스가 보이는

앙티브의 풍경화 40 여점를 그렸다고 합니다.

제가 갔을 때도 태양은 찬란했고 산은 푸르고 핑크빛이 나고

더 멀리 만년설을 이고 있는 알프스가 보였습니다.

 

 

I'm painting the town of Antibes, a small fortified town turned gold by the sun,

standing out against beautiful blue and pink mountains and the everlastingly snow covered Alps."

Claude Montet

 

 

앙티브에서 돌아온 모네는 그 해 6월에 그 중에서 10점을 전시했는데 모든 작품은

고흐의 동생 테오가 11,900프랑에 구매했다고 하네요.   그 외의 작품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팔려서

미국의 딜러들에게 재빠르게 팔렸다고 합니다.

http://art-landscape.blogspot.com/2010/06/40-antibes-landscapes-in-4-months-by.html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가방이 리조트 사무실에 와 있어서

짐을 정리해 놓고 앙티브로 나갔습니다.  숙소에서 남쪽으로 약 15km....

 

그런데 여전히 길은 좁고 꼬불꼬불...왜 그렇게 로타리(라운드어바웃)가  많은지,

불과 몇 백미터도 못 가서 또 나오고.. 그럴 때마다 절절 매면서

그래도 어찌어찌해서 수많은 배들이 정박되어 있는 Port Vauban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성채 쪽으로 인파를 헤치며 들어갔는데 차를 주차할 곳이 전혀 없는거예요.

너무 좁은 길이라 그 큰 차를 돌려 나가기도 어려운데 그래도 또 돌려서 나가

피카소 미술관이 있는 구 시가지, 성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는데 길은 더욱 좁고 일방통행도 많고

마침 일요일 오후였으니까 주차 공간은 전혀 없고 한참을 헤메다가 다시 성을 빠져나와

입구쪽에 있는 지하 공용주차장을 찾아 겨우 주차하고.... 휴... 걸어서 나왔습니다.

 

 

 

지하 주차장이라 들어올 때 미쳐 알아보지 못했던 거예요. 

그래도 비교적 널럴한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안심이 되어 카메라만 들고

천천히 다시 구시가지, 바닷가를 끼고 걸어 올라가는 피카소 뮤지엄으로 갔습니다.

 

 

 

 

 

 

 

피카소가 빠리에서 내려와 남프랑스 무장 Mounjins에서 살고 있을 때

앙티브에 있는 그라말디 城에서는 피카소에게 성 안에 아틀리에를 마련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2차대전이 시작되자 1939년에 빠리에 돌아갔다가

전쟁이 끝나고 1946년에 다시 앙티브로 돌아와서 앙티브 해변을 그 당시의 연인이었던

프랑스와즈 질로 (Françoise Gilot, 1921 - )와 벌거벗고 산책을 하기도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피카소에 관한 어느 동영상을 보니 바다를 무척 좋아했던 피카소가 질로와 함께

수영을 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아마 그 모습을 두고 벌거벗고 산책했다고 말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이곳 사람들이 벗는다는 개념은 동양인인 우리와는 너무 다르니까 니스에 나체해변이 있듯이

이들이 벗고 산책한다는 것은 아무런 꺼리낌이 없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 아래 해변에는 인적도 드물었을테니까요.ㅎ

 

 

Joie de Vivre, 1946

"삶의 기쁨" La Joie de Vivre, 1946 (image from internet)

 

 

아무튼 앙티브에서 살 때 첫번째 아내인 올가와는 여전히 이혼하지 않았을 때인데

여섯번 째의 여인으로 40살이나 어린 질로에게서

아들 클로드(Claude Picasso, 1947 - )와 딸 팔로마(Paloma Picasso, 1949 - )를 낳으며

그의 작품 "삶의 기쁨"에서 보여주듯이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피카소는 이 시대에 자신의 아이들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남겼고 그 어느 때보다

가족을 중심으로 그의 삶이 풍요로웠지만 이 때에도 피카소는 여전히

그 전의 여자들과의 관계가 계속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못 말려, 증말,,,!!

 

피카소는 "앙티브의 밤낚시", "삶의 기쁨" 등 이곳에서 그린 그림과 사진, 도자기 등을

 

이 성에 기증하면서 이 성은 그라말디 미술관에서 피카소 미술관으로 이름이 바꿔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대단한 화가였는지...., 프랑스인도 아닌데...

 

물론 성은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습니다.

 

 

 

 

주차때문에 헤메다가 뮤지엄에 도착했을 때는 곧 문을 닫을 시간인지라

다음 날 다시 오려고 했는데 표를 파는 데스크에서 잠간이면 다 돌아볼 수 있다고

입장을 권유...밖에는 사람들이 넘쳐났지만 막상 뮤지엄은 한가해서 그런지...

별로 전시된 작품은 많지 않아서인지 입장료도 3유로, 그러나 사진활영은 금지...에고..미워!!!

뮤지엄에 들어가니 그의 그림보다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흥미있는 사진들이 많이 있었고

도자기 작품도 많이 있었는데 감시가 심해서 도찰도 못했습니다. ㅋㅋ

 

 

 

 

뮤지엄 뒷 정원으로 나가니 담 위에는 조각가 Germaine Richier의 여인네들의 조각상 4개가

지중해를 등지고 서 있었고 (피카소의 여인들은 아닌 것같았음) 날씨가 화창해서 그런지

그리 심하지 않은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고 있었고 멀리 모래사장도 보였습니다. 

 

 

 

이 바닷가에서 피카소가 벌거벗고 산책을 했을까?  여전히 이런 것만 궁금해 하는 첼로...ㅎㅎ

 

 

숙소에서 가까운 곳이니까 뮤지엄에는 다른 날 다시 와서 천천히 감상(?)하려고,

해가 지기 전에 성채로 가서 사진을 찍을 생각으로 서둘러 뮤지엄을 나와 성채로 갔습니다.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난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1881-1973)는

1973년 4월 8일 남프랑스 무장 Moujins 에서 91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해서

세잔의 고향 액상 프로방스에 있는 생 빅투아르 산자락에 묻혔다고 하네요.

 

미술사에서 그 이름이 영원하게 기억될 피카소,

변천되는 미술사조에 대해서는 무식한 첼로는 알려고도 하지 않지만

그는 91세로 장수하면서 수 많은 여자들과 끊임 없이 교제하며 영감을 얻었다고 하니

정력도 대단하고 더블어 재력도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피카소가 1904년 빠리로 이주했을 때 첫번째로 만난 여인은 프랑스여인으로

피카소의 모델이었고 유부녀였던 페르낭드 올리비에 Fernande Olivier(1881-1966),

피카소와 동갑네기로 23세 때 만나 9년간 동거생활을 하다가 헤어지고

1912년에 두번째 여인인, 유난히 피부가 하얗고 병약했던

에바 구엘 Eva Gouel(1885-1915)을 만나지만

그녀는 제1차 세계대전 이듬 해인 1915년에 결핵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결핵에 옮을까봐 에바를 멀리하면서 다른 여자들도 만나고 있었지만

그녀의 죽음을 몹시 슬퍼했다는 피카소....

 

 

 

 

그 후 1917년에 만난 러시아의 무용수였던 올가 코클로바 Olga Kokhlova (1891-1955)와

피카소는 처음으로 결혼을 하고 첫 아들인 파울로(Paulo, 1921 - 1975)를 낳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부부관계는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다른 여자 마리 테레즈와의 관계를 알게 되자 이혼을 하려고 했지만

재산 문제 등으로 그녀가 죽을 때까지 이혼을 하지 못하고 법적인 아내였다고 하네요.

올가에게서 난 첫 아들 파울로는 결혼을 하여 아들 파블리토와 딸 마리나를 낳았는데

손자 파블리토는 할아버지 피카소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갔다가

그 당시 7번째 여인이며 두번째 아내였던 자클린 로크가 참석을 거부하자

독약을 먹고 자살을 하였다고 합니다. 

 

피카소의 아들 파울로도 알콜과 약물중독으로 피카소가 죽은 뒤 2년 후에 죽고

파울로의 아내인 Emilienne은 알콜중독이 되었고...

그래도 그들의 딸, 피카소의 손녀 마리나는 <Picasso, My Grandfather>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할아버지 피카소를 한마디로 "terribly famous, not terribly nice",

피카소의 자손들은 아무도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다고, 그러나 그녀는

개인소장하고 있던 피카소의 작품들을 거액에 매매하기도 하며 유일하게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인물인 것같습니다.

 

 

 

 

네번째로 만난 여인이 1927년, 당시 17세의 금발의 마리 테레즈 (Marie Terese Walter, 1909 - 1977),

45세의 유부남인 피카소는 당시 17세의 아름다운 소녀 마리 테레즈 (이후 MT)를 6개월이나 쫓아다닌 끝에

그녀와 교제하게 되고 그녀는 아내가 있는 피카소의 모델로 감추어진 여인이었는데

1935년 그녀가 임신을 하게 되자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올가는 즉시 남프랑스로 떠나면서

피카소와 이혼하려고 했지만 피카소는 재산문제로 올가가 죽을 때까지 이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MT는 딸 마야(Maya Widmaier Picasso, 1935 - )를 낳고 잠시 피카소와 단란하고

행복한 시간을 가졌지만 피카소는 1936년에 또 다른 여자, 사진작가이며 화가, 시인인

도라 마르(Dora Maar, 1907 - 1997)를 친구한테서 소개받았는데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자란 도라가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에 반해 버린 피카소...ㅋㅋ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의 제작 과정 전체를 사진으로 기록하였던 그녀가

딸을 낳은 MT에 대해 라이벌 의식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와중에 피카소는 여섯번째 여인,

프랑스와즈 질로를 만나고 도라 마르는 정신과 의사에게 보내 치료를 받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피카소와 헤어진 후 심리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훌륭한 화가로 시인으로 사진작가로

일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여섯번째로 만난 프랑스와즈 질로(Françoise Gilot, 1921 - ),

20대의 미모의 제자로 위에서 말한대로 40세나 연하이었던 그녀가

1944년부터 1953년까지 피카소와 함께 살면서 아들과 딸을 낳았지만 끝내 피카소와

결혼은 하지 못하였고 9년 만에 질로는 피카소와 헤어지고 다른 사람과 결혼...

그러나 지금도 피카소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더군요.

아둘 클로드도 사진작가, 필름메이커로, 딸 팔로마는 패션 디자이너로,

티파니의 보석디자이너로, 사업가로도 유명하네요.

 

마지막으로 1953년 72세의 피카소는 자클린 로크(Jacquiline Roque, 1927-1986)라는

20대의 젊은 이혼녀를 만나 8년간 동거한 후 1961년에 두번째로 결혼을 하였으며

자클린은 피카소가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를 잘 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피카소의 나이 23세에 시작하여 91세까지 거쳐간 여인이 7명,

거의 10년 만에 한번씩 상대를 바꾸었고 두번의 결혼에 5명의 애인들...

이들을 후대사람들은 피카소의 "7 뮤즈(Muse)"라고 한다지요?

이 대목에서 '7송이 수선화 Seven Daffodils'라는 노래가 생각나는 못 말리는 트리오...

여자가 바뀔 때마다 그의 그림 풍조도 달라지고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7명 외에 알려지지 않았던 여인들도 있지 않았을까요? ㅎ

 

과연 그 여인들의 삶은 피카소와 더블어 행복했을까요?

그들은 피카소가 떠나고도

피카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연연해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첫번째 아들 파울로를 1921년에 낳았는데

그 아들이 아내 Emilienne 과의 사이에서 손자 파블리토(1949- 1973)와

손녀 마리나(1950 -)를 낳았을 때가 여섯번째 여인 프랑스와즈 질로와의 사이에서

아들 클로드(1947 - )와 딸 팔로마 (1949- )를 낳을 때와 비슷한 시기였네요. 

참 노인네가...ㅎ

 

1973년 피카소가 죽자 장례식에 불참하게된 손자 파블리토의 자살을 시작으로

1975년 큰 아들 파울로는 알콜과 약물중독으로 죽고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가 죽자 4년 뒤 1977년에 하늘나라에서라도 그를 도와야 한다고

목을 메어 자살을 했고 마지막 여인이었던 두번째 아내인 로크도 피카소의 사후에

재산과 작품 정리 등 많은 일을 담당하다가 1986년에 피카소의 전시회를 앞두고 권총자살...

비극적인 일들이 이어졌습니다.

피카소의 작품 한 두점만 가지고도 평생을 편히 먹고 살았을텐데

왜 자살을 했을까요? 그만큼 그들의 사랑이 순수하기 때문이었을까요?

 

 

 

 

 

 

생전에 빛을 보지 못하고 그림 한 점을 팔지 못하여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던

많은 다른 화가들에 비해서 피카소는 장수를 누리며 부를 누리고

미모의 젊고 지적인 많은 여성들을 자신의 붓과 같은 존재로 여기며 창작에 몰두하여서

오늘날 그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는, 미술계에서 불멸의 존재가 된 피카소에게

그 많은 여성편력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보내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같습니다.

 

정치가들의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을 하는 세인들도 예술가들에게는

왜 면죄부를 적용하고 있는지... ㅋㅋ 그저 트리오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아무튼 현재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은 6번째 연인이었던 여류화가 프랑스와즈 질로,

그녀가 피카소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 마리 테레즈가 낳은 딸 마야,

그리고 큰 아들 파울로의 딸인 피카소의 손녀 마리나...

에고고...더 이상은 모르겠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길다면 긴...91년의 생을 살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인생은 짧고 허무하고...

예술은 역시 위대하고 영원하네요.

 

 

 

피카소와 프랑스와즈 질로, 앙티브의 화실에서..1946년 (인터넷에서 가져온 사진)

 

 

그림에 대해 문외한이라 피카소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여

간단하게 쓰려고 했는데 복잡한 여성관계가 흥미로워서

일일이 검색해 보느라 이 포스팅이 이렇게 길어지고 늦어졌습니다.

그래도 고마운 구글이여! ㅎㅎ

 

 

 

 

지금부터는 cello한테는 결코 잊지못할 재미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ㅎ

피카소 뮤지엄에서 나와 많은 배들이 정박되어 있는 Port Vauban을 지나

해안 절벽을 따라 쌓아 올린 성채로 올라갔습니다.

 

 

 

성채로 올라가서 중간 중간 성벽의 빈틈사이로 저물어가는 바다를 훔쳐보다가

정답게 키스를 하고 있는 젊은 연인들도 만나고...

 

 

 

 

 

 

성채 위 한쪽에 멜라니님이 궁금하다는 조각품이 멀리 산과 바다를 바라다 보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조각가 Jaume Plensa (1955 - )의 작품입니다.

오스트리아 잘스부르그의 어느 미술관 앞에서도 이런 조각품을 본 적이 있는데

이번에야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세계 여러나라에 그의 조각작품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알파벳 같은 글자들로 구성된 이 남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석양이 물들어가는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굽은 등이 왜 이리 시려보였는지...

 

 

 

 

 

성채에서 꿈도 야무지게 앙티브의 밤바다를 렌즈에 담겠다고

인적도 이미 끊어진 검은 바닷가에 내려오니

멀리 있는 건물의 불빛에 반사된 황금빛 파도가 모래를 쓸어 내리고 있었습니다.

 

 

 

 

 

 

 

 

 

야경을 제대로 담으려면 삼각대가 있어야 하는데 가지고 오지 않아서

다른 날을 기약하며 주차장으로 갔습니다.

다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차를 타고 출구로 가서

크레딧카드로 주차비를 지불하려고 하는데 톨게이트에서 처럼

이번에도 마스터카드가 안되는거예요.ㅋ

현금으로는 낼 수도 없고 카드만으로 지불하게 되었는데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는 아예 안 받고...바로 옆에 있는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고...

다시 차를 뒤로 돌려 주차를 하고 사무실 앞으로 가서 벨이 있어서 누르니

어떤 사람이 나오길래, 내가 가지고 있는 카드가 안된다고, 현금으로 내겠다고 하니,

그 사람이 카드를 넣고 작동해 보더니 역시 안되니까

막대기를 올려주면서 그냥 가라고 하네요. 현금을 주려고 해도 받지 않고...ㅋㅋ

 

아니 어쩌자고 다른 식당이나 마켓에서는 사용되는 마스터카드가

톨게이트와 주차장에서는 안되는 것인지...

다른 날 다시 가려고 했던 계획도 카드때문에 가지 못한거예요. ㅎㅎ

에고...정말로 차 때문에 너무 힘들었던 여행이었습니다.

 

 

 

여행 중 내내 트리오를 쫄게 했던 런트카입니다.

차를 돌려줄 때 렌트카 직원에게 불평을 했더니

그래도 프랑스 대통령이 타는 차라고 하더군요. ㅎㅎ

고급차 타고 힘들었다니, 참 아이러니칼 하지요?

 

반토막 난 것같은  이런 차가 그곳에는 적절한데...

부뚜막에 쉽게 올라가는 고양이처럼

길 가에서도 아무데나 쑥 올라가서 주차를 하더군요.

하기사 큰 버스도 다니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스페인의 작곡가 사라사테 Sarasate의 '지고이네르바이젠 Zigeunerweisen' 입니다.

 

스페인 태생의 피카소를 이야기 하다 보니 듣고 싶어지네요.

잘 아시지요?  그리고 좋아하시지요? 가장 좋아하시는 곡인가요? ㅎㅎ

음악평론가인 김갑수님은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라는 그의 저서에서

클래식 음악의 통속성과 대중성을 이야기 하면서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랄로의 첼로 컨체르토가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로바이젠'처럼 대중적이면서도 통속적이라고... 

 

"...어쨋거나 어느 고적한 밤에 사라사테의 '치고이네로바이젠"에 심취할 수는 있겠으

그렇다고 제가 가장 사랑하는 곡은 치고이네르...라고 말하기는

좀 거시기한 그런 것이 랄로에게 느껴진다는 이야기," (저서 페이지 20에서)

 

그러므로 유명 연주자들의 랄로 첼로 컨체르토 레코딩이 많지 않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물론 동감하는 면도 있지만, 레코딩이 많지 않으면 대중적이고 통속적인지...

오히려 레코딩이 많은 곡이 대중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통속적인 것은 아니라 할찌라도... 

 

그림에 지극히 문외한인데 피카소의 복잡한 여인관계를 검색하다 보니

좋아하면서도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라고 말하면 음악에 좀 무식해보이는지 

좀 거시기(?)하다고 말하고 있는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 이 곡이 듣고 싶어집니다. ㅎㅎ

이 곡이 끝난 다음에 양희은씨가 부른 '일곱송이 수선화'

오랫만에 듣고 싶어서 올립니다.

Brothers Four나 다른 외국가수들이 부른 것보다 이 노래는 역시 양희은이예요.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더군요.